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문단 편집) == 생애 == [[신성 로마 제국]]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지만 1397년이나 1398년이 유력하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마인츠에서는 1400년 6월 24일을 구텐베르크의 "생일"로 정해 대대적으로 축하했지만,[* 그래서인지 70~80년대 인명대백과 사전이나 학습서에선 구텐베르크 생몰연도를 1400~1468 이라고 표기한 게 많았다.] 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있어서 정한 날짜는 아니다. 그의 이름이 요하네스인 것에 착안하여 세례자 요한의 축일인 6월 24일을 그의 탄생일로 지정한 것.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부친은 하급 귀족 출신으로 조폐국의 관리로 일했으며[* 부친의 업무는 화폐의 주조였기 때문에 야금에 대한 상당한 기술을 갖추고 있었으며 요하네스도 야금에 일가견이 있었다. 당연히 금속활자를 개발할 때도 부친으로부터 배운 야금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친도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다. 한편 요하네스의 부친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겐스플라이슈 추어 라덴(Friedrich Gensfleisch zur Laden)으로 성이 구텐베르크가 아니라 겐스플라이슈였는데, 요하네스가 30살 경에 구텐베르크라는 이름의 저택을 사들이면서 구텐베르크라는 성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구텐베르크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정말 드물며 유럽 역사에 남긴 족적에 비해 당대에도 후대에도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최근까지도 이동식 금속활자 인쇄기를 고안한 업적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는데, 판매용으로 제작된 인쇄물 외에는 직접 자신에 대해 남긴 문서나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의 행적은 재판기록이나 몇몇 문서에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내용에 의존해서 유추할 수밖에 없으며 그나마 이 한줌의 자료마저도 대부분 최근에 발굴된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태어났던 1400년대 초반 마인츠에서는 귀족들에게 대항한 농민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가문이었던 구텐베르크 가족은 한때 마인츠를 떠나 엘트빌러라는 작은 마을로 도피하기도 했다. 1419년경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끝까지 학업을 마쳤는지는 불확실하다. 이후 부친이 사망하자 마인츠에서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아서 화폐주조와 야금업에 종사한다. 당시 마인츠에서는 기득권인 귀족들과 신흥 세력인 [[길드]]가 대립하고 있었다. 시는 부유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연금 제도를 운영했는데, 그 실상은 [[폰지 사기]]였다. 이 폰지 방식의 연금은 고객층을 계속 넓혀나가야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고객층이 마인츠 시민으로 한정되어 있던 상황에서는 당연히 오래갈 수 없었고 궁지에 몰린 시가 세금을 올리자 길드는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이에 덩달아 분노한 귀족들이 도시 밖의 사유지로 이사를 가버리고 시는 파산했다. 구텐베르크도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진행되던 도중인 1429년 자신에게 지급되던 연금이 절반으로 줄자 시를 떠나버렸다. 1434년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는 소송을 통하여 마인츠 시 당국으로부터 못받은 연금들을 다 받아냈고, 그렇게 마련한 목돈으로 사업을 하나 계획한다. 당시 독일 지역에는 7년마다 [[아헨 대성당]]에 찾아가 네 개의 성유물[* 예수가 태어나던 날 마리아가 입었던 옷, 아기 예수를 감쌌던 포대기, 세례 요한의 잘린 머리를 쌌던 천,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허리에 둘렀던 천이었다.]을 눈으로 보고 오는 순례 행사가 있었다. 특히 이 무렵에는 유물들을 구경할 때 작은 거울(Spiegeln)[* 정확히는 핀을 달아 옷에 달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금속제 거울이라고 한다.]을 머리 위로 쳐들어 유물에서 뿜어져나오는 '빛살'을 받는 것이 유행이었다. 거울에 깃든 빛살이 나중에 거울을 볼 때마다 복을 준다고 믿은 것이다. 다음 순례 행사가 1439년에 있었고, 구텐베르크는 거울을 만들어 아헨으로 가는 길목의 순례자들에게 팔 생각이었다. 나름 참신한 사업 아이디어였지만 1438년 역병이 돌면서 이듬해에 열릴 예정이었던 행사는 연기되고 당연히 구텐베르크의 사업도 망했다. 다만 이 거울사업과 별도로 스트라스부르크로 이주한 이후부터 이미 인쇄업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439년 스트라스부르크 법원의 재판기록에서 구텐베르크가 출자자를 모아서 인쇄업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이때 자신의 야금기술을 이용한 금속활자의 개발에 힘을 쏟았다고 되어 있다. 1440년대에 구텐베르크의 행적은 불확실하나 1440년대 중반 시집을 출판했다는 것으로 보아 인쇄업을 계속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48년, 구텐베르크는 그의 누이가 죽으며 남긴 고향집을 상속받아 마인츠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자신이 개발한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업을 시작하는데, 바로 이 사업이 '''유럽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구텐베르크는 자신이 발명한 인쇄기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항상 혼자서 인쇄기를 만들고 개량했으며 제작 기술은 철저하게 비밀에 붙였다. 많지 않은 기록에 의하면 구텐베르크는 당시 인쇄기 개발을 위한 자금 마련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마인츠의 부유한 금세공사였던 요한 푸스트에게 돈을 빌렸다고 한다.[* 재판기록에 의하면 800굴덴의 거액을 두 번 빌렸는데 중간에 갚은 돈은 없었다. 800굴덴은 당시 단순 임금노동자의 15년치 연봉에 해당되는 거액이었다.] 푸스트에게 돈을 빌리는 대신 구텐베르크는 푸스트와 일종의 동업 형태로 인쇄소를 차렸다. 1450년경 그가 새로운 인쇄법으로 처음 인쇄한 책은 당시 라틴어 교재로 널리 쓰이던 <문법학(Ars Grammatica)>이었다. 얼마 후 마인츠에 있는 장크트야코프 수도원장이 구텐베르크에게 [[면죄부]] 2,000 장의 인쇄를 주문한다. 당시 교회에서 발행하는 면죄부는 효력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정 기한이 있었기 때문에[* 가격에 따라 1주일, 1달, 3달, 1년 등등의 효력을 가진 다양한 면죄부가 있었다. 기간 뿐만 아니라 죄의 종류와 죄질에 따른 면죄부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기에 교회가 물욕에 찌들었다고 욕먹을 수밖에 없었다 ] 주기적으로 발행했으며, 교회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종이나 활자가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면죄부는 인쇄품질이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만족했으며 이로 인해 교회에서 계속 주문이 들어오게 되었다. 교회와 거래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구텐베르크는 독일, 아니 유럽 전역의 교회를 공략하기로 한다. 모든 교회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일까? [[성경|답은 정해져 있었다.]] 구텐베르크는 1452년부터 본격 성경 출판에 착수했으며 3년간의 노력 끝에 1455년 구텐베르크 성서라고 하는 최초의 라틴어(불가타)성서가 완성되었다. 이 성경은 2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0굴덴이라는 거액에 팔렸다. 이 구텐베르크의 성경 초판은 180부가 인쇄됐는데, 매우 비싸긴 했지만 당시 필사로 제작된 성경이 100굴덴이 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었으며 인쇄품질도 훌륭했기 때문에 꽤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성경을 팔아서 대박을 쳤던 구텐베르크는 같은 해 채권자인 푸스트로부터 원금반환 소송에 휘말린다. 독일의 괴팅겐 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455년 11월 6일자 헬마스페르거 공증문서에 이 소송에 대한 기록 일부분이 남아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푸스트는 구텐베르크가 자신이 빌려준 돈 상당수를 다른 용도로 유용했으며 변제하려는 의지도 없어서 소송을 걸었다고 되어 있다. 이 소송은 1456년 결국 푸스트가 승소하면서 2번에 걸쳐 빌린 원금 1600굴덴에 6% 복리이자를 합해서 합계 2,026길더를 갚으라는 판결이 내려졌으며 구텐베르크는 이 거액을 갚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인쇄장비를 비롯한 모든 재산을 빼앗기는 신세가 됐다. 재정적으로 파산한 이후의 구텐베르크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1468년에 죽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막연하게 계속 어려움을 겪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을 것이라는 짐작만 있었는데, 최근에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말년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파산한 후 충격으로 실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특별한 정황이나 근거는 없다. 소송에서 패한 이후 구텐베르크는 다시 자택에서 작은 규모로 책을 찍어내기 시작해서 1457년과 1460년에 라틴어 사전 카톨리콘을 출판했다. 1462년에는 나사우의 대주교 아돌프 2세가 마인츠를 점령했는데 이때 마인츠에서 쫓겨나 어린 시절에 잠시 살았던 마인츠 근처 도시인 엔트빌레로 이주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신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대주교 아돌프 2세는 마인츠에서 계속 인쇄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1465년에 구텐베르크에게 인쇄술을 발전시킨 공로로 연금을 하사했다. 한동안 아돌프 2세의 궁정에서도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구텐베르크는 1468년 70여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한편 구텐베르크의 인쇄소를 넘겨받은 요한 푸스트는 자기 사위이자 구텐베르크 밑에서 일했던 인쇄공 페터 셰퍼와 같이 인쇄소를 운영하였는데[* 셰퍼는 구텐베르크와 푸스트가 재판을 벌였을 때 구텐베르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면서 푸스트의 환심을 샀다. 구텐베르크가 재판에서 지고 쫓겨난 후 구텐베르크를 대신해서 인쇄소를 운영하면서 푸스트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푸스트가 흑사병으로 죽자 셰퍼가 단독으로 운영하게 된다. 이후 셰퍼 집안은 유럽 각지에 인쇄소를 차려서 크게 성공했다. 인쇄업이 각광을 받자 셰퍼 외에도 구텐베르크 밑에서 일했던 인쇄공들이 유럽 각지에 인쇄소를 차리면서 인쇄술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